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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동 궤도식 강습차 모토베르디 ‘카론’

주제: 무한궤도 형태, 설계, 기능성, 모터바이크의 역사, 명암 디자인



“이번엔 완전 사다리꼴이다!”


영화 광고 멘트를 흉내 내 보았다.

지난번에 모처럼 전투차량을 디자인하고 나서 의욕은 더욱 팽배했다. 겨울이라 산책도 운동도 뜸하고 자연 생태계(거미를 비롯한 절지동물) 관찰은 아예 불가능하니 글이나 쓰고 디자인 따위나(크학학!) 해야지.

지난번 지크프리트 디자인 이야기에서 디자인 뇌의 한계점을 강조했다. 3년 만에 디자인에 매달리자 장단점이 있었다.

2009년 후반의 집중적인 신생산시에는 기량이 늘고 감각이 예민해졌지만 ‘현대 무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고기동 궤도식 강습차량(트래클)에 관심을 보이며 의견을 주신 분들 덕분에 보다 새롭고 기능적인 형태에 주목했다. 또한 SF적인 느낌이 너무 강하지 않도록 절제해 왔었는데 그런 유형에 대한 지지도 있어서 해묵은 갈등에서 벗어났다.

몇 년 디자인을 떠난 사이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장점: 3년 전에는 ‘현대적인’ 차량의 디자인에만 집중적으로 매달리다 보니 보다 참신한 시도가 쉽지 않았는데 그것을 깨뜨렸다. 또한 몇 년 동안 많은 아이들, 청소년들과 어울리다 보니 정서에 변화가 생겼다.

단점: 물론 디자인 감각이 많이 줄어든 것이다. 또한 몇 년 동안 생물만 상대하다 보니 메커니즘 쪽의 뇌가 많이 약해졌다.

그러나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컸고, 휴지 기간을 통해 새로운 각도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감각이 줄어든 것은 몇 번 작업을 하다 보면 곧 되살아난다.

모형 애호가들은 SF적인 기계들을 ‘메카닉’이라고 불렀는데 주로 로봇, 정확하게는 사지 혹은 팔이 달린 기계를 의미했다. 내가 왜 ‘로봇’이라는 표현을 신중히 쓰는가 하면 사전적 의미 그대로 로봇이란 ‘자동으로 일을 수행하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올라타서 조종하는 기계를 로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리로 걷는다고 모두 로봇은 아니다. 나는 이런 유형의 기계를 보행차량이라고 부른다. 전투용 기계라면 보행병기라고 부른다.

2009년 여름에 이곳에 올렸던 아퀘이브(ARCWAV)는 4족 보행 무인 자주포인데 ‘원격조종 무장 보행차량’의 영어 약어이다. 산업 현장에서 스스로 중량물을 운반하는 무인 기계를 개조한 것이므로 사실상 로봇이라 할 수 있지만 전투용으로 쓰이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발포하지는 못하고 사람이 조종하게 했다. 이런 경우 넓은 의미에서는 로봇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제식으로 운용될 때는 용도에 의한 분류가 따르므로 단순하게 로봇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보다 미래적인 감각에 눈을 뜬 덕분에 모처럼 디자인을 하면서 최초로 작업한 지크프리트는 정말 참신한 차량이 될 뻔했다. 다만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독특한 시도를 포기했고 결국 그리 참신하지 않은 차량이 되어 버렸다.

·근본적인 문제는 암(arm) 하나로 앞바퀴에 구동력을 전달하는 동시에 완충 작용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디자인 후기를 쓰다 보니 뒤늦게 해결책이 나왔다. 그래서 곧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시도해 며칠에 걸쳐 완성한 지크프리트가 미래적이지 못하고 그저 현대 차량 수준에서 끝나다 보니 다음 차량에까지 영향을 미쳐 차체의 형태가 그리 독창적이지 못했다. 어째 크고 작은 상자를 쌓은 듯한 형태라고나 할까? 레고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크학학!)

물론 독창적으로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독창적이기는 하되 너무 튀면 안 된다. 즉 일본 SF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직선과 곡선이 잘 조화된 독특한 선의 흐름을 도입하면 자칫 ‘딴 나라’에서 온 것처럼 되어 버린다. 바이크나 항공기라면 몰라도 이것은 엄연히 제식화 된 전투차량이니 기존의 것과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기존과 새로운 시도의 조화라는 것, 그게 가장 어려운 점이다.

둘째, 마우스만으로 작업하기가 무척 어렵다. 일단 머릿속에서 그린 것을 화면에 옮기는 과정에서 감각이 실종된다. 예술적, 혹은 창의적 감각이란 쉽게 증발할 수 있어서 손발을 움직여 빨리 기록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번 종이에 대충 그린 뒤에 작업할 수도 없고.

또 하나의 문제는, 내키는 대로 신나게 디자인하다 보면 선의 흐름이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인데, 모처럼 디자인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 빠른 시간 내에 결과물을 내고 싶었다.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친 것이 있었다. 차체 양쪽 앞으로 뻗은 암에 차바퀴 대신 궤도를 장착한 형태는 어떨까? 궤도차량은 궤도 자체만으로도 독특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사실 궤도가 포인트이다. 그런데 앞쪽 바퀴가 기다란 암에 매달려 있다면 꽤 참신한 형태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작업에 들어갔다.


 카론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차량의 명칭은 애초 정하지도 않고 드로잉을 끝낸 뒤 페인팅 작업을 하다가 겨우 떠올리고 뒤늦게 명명했다.

먼저, 늘 그랬듯이 작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이번 차량은 기존의 트래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카산드라부터는 보다 SF적인 이미지를 부여해 형태는 많이 달라졌지만 기술적 변화는 별로 없었다. 따라서 기존의 트래클들은 모두 독일의 바이크 제작사에서 개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카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능적으로도 매우 다르다. 따라서 다른 바이크 제작사를 생각해 보았다. 현재 전 세계 바이크 산업을 꽉 잡고 있는 일본 것으로 할까? 그러나 일본식 느낌은 아니다. 그렇다면 또 어디?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모토베르디 제품으로 정했다.

모토베르디는 가공의 업체로 전작인 <빌어먹을 천사>에 언급된다. 주인공은 낡은 건물 벽면에 그림이나 그려 먹고 사는 하층민이면서 오직 고급 바이크에 대한 열망 하나로 살아가는데, 전자제품 가게를 턴 돈으로 괜찮은 리모델링 중고 바이크를 구입한다. 그런데 시내에 나갔다가 바이크 패거리들의 주목을 받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허둥지둥 달아난다. 그러자 패거리는 쫓아오는데 그들이 탄 바이크가 모토베르디 제품으로 되어 있다.

바이크 얘기가 나온 김에 잠시 짚고 넘어가자. 모터바이크는 인류가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다음해인 1904년에 처음 탄생했다. 미국의 할리와 데이비슨이 공동으로 제작해서 할리데이비슨이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격동하는 제국주의 시대였던 20세기 초반, 미국은 강대국들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는 유럽이나 동아시아에서 동떨어진 곳에 위치한 까닭에 안일한 면이 있었다. 동력 비행기, 모터사이클, 완충장치에 토션바를 채용한 쾌속전차 모두가 미국에서 개발되었지만 유럽 국가들이 발전시켰다. 특히 비행기와 쾌속전차는 훗날 전쟁의 양상을 뒤바꿀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에도 미국에서는 무시당했다. 1차 대전 발발로 유럽에서 전투기들이 발전하고 쾌속전차는 2차 대전 때 소련에서 진화한다.

‘전쟁과 모터사이클’ 하면 대뜸 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이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모터사이클을 정말 잘 활용했다. 정찰, 연락, 기동타격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당시 독일에는 양대 모터사이클 업체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베엠베(BMW)로 지금도 유명하다. 승용차도 생산하고 있었고 또한 엔진이라면 꽉 잡고 있으니 전투기 엔진까지 생산했다. ‘독일 공군의 깡패 형제’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메서슈미트 Bf-109와 포케불프 FW-190 시리즈는 말 그대로 당시 독일 공군을 대표했다. ‘형님’인 Bf-109는 V형 엔진을 탑재했는데 이는 다임러-벤츠가, 아우 FW-190의 방사상 엔진은 베엠베가 생산했다. 특이하게도 베엠베 바이크는 동력 전달에 체인이 아닌 샤프트를 사용하는데, 그만큼 무겁고 복잡해지고 마찰도 크겠지만 체인이 끊어져 사고가 날 일은 없을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가장 득을 본 것은 물론 미국이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온통 폐허로 변하고 산업 기반이 무너졌는데 ‘바다 건너’ 정도가 아닌 ‘대양 저 멀리’ 있는 미국은 피해를 입기는커녕 대전 기간 동안 산업이 더욱 발전했고, 또한 그 이후에는 시장이 훨씬 확대되어 황금기를 맞았다. 모터사이클의 원조인 할리데이비슨도 즐거운 세상을 노래 불렀다.

그런데 일본이 치고 나왔다. 예전에 어디선가 읽은 기억에 의하면 60년대 초만 해도 일본에는 60개가 넘는 바이크 제작사가 있었다. 한마디로 춘추전국이다. 그런데 혼다의 뛰어난 경영으로 서서히 평정되면서 대표적인 업체 네 곳만 남았다.

어이없게도 과거 한국에서는 오히려 혼다가 가장 알려져 있지 않았다. 무조건 “야마하!”만 외치는가 하면 한때는 스즈키 붐이 일기도 했다. 그러다가 ‘표준의’ 750cc 바이크 시장에서 아메리칸 초퍼 스타일인 가와사키의 벌컨이 ‘싼 맛에’ 널리 퍼지자 너도나도 “가와사키!”를 부르짖으며 터미네이터가 제2부에서 타고 나온 할리데이비슨 팻보이조차도 가와사키 벌컨으로 착각했다. 처음에 야마하를 부르짖던 이유는 아마도 야마하가 그랑프리 경기의 강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원조 터미네이터가 타고 다니던 바이크는 구식 혼다 CB-900이었다. 그만큼 국제 시장은 혼다가 장악하고 있었다.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이 가장 적대시했던 대상도 혼다다.

바이크의 원조였던 할리데이비슨은 일제 고성능 바이크들에 밀려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OHC가 아닌 OHV 방식의 V형 엔진을 고수했고 출력이 낮아서 보다 가볍고 고성능에 디자인까지 죽이는 일제 바이크들에 경쟁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일제는 값도 싸다! 자꾸 새로운 모델을 선보여 호기심도 증폭시킨다.

그러나 역시 원조 할배 국밥(?, 크학학!)의 전통은 무시할 수 없다. 할리데이비슨은 그 전통과 명품 정신을 고수하여 후일에는 한국에서도 일제 바이크의 명성을 누르고 가장 이름값이 높아졌다. “몇 년 타고 갈아 치우는 기계”가 아니라 오랜 세월 함께 하는 반려자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개조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차량을 만들 수 있고, 묵으면 묵을수록 골동품 가치가 생긴다.

그밖에 바이크로 유명한 나라로는 이탈리아가 있다.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의 원조로 유명했던 나라이니만큼 그런 쪽의 감각은 있나 보다. 바이크는 두카티와 모토구찌(本口? 아님! Moto Guzzi)가 유명하다. 그런데 바이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왠지 낯익은 이름, 구찌? 패션으로 유명한 파올로 구찌와 어떤 관계일까? 생각해 보니 철자가 다르다. 구찌는 ‘Gucci’이다.

모토베르디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의 이름을 슬쩍 연결시킨 것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내 맘이다! (크학학!)

이번에 새로운 트래클을 디자인할 때는 역사성(!)을 고려하여 전작에 나왔던 바이크 회사를 연결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모토베르디 제품으로 설정했는데, 제품명은 그냥 익숙하게 영어로 하려 했다. 그런데 체코나 독일 제품은 그 나라 이름을 쓰면서 왜 이탈리아만 무시하나? 아무리 <석양의 무법자> 같은 미국인이 주인공인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스파게티 워무비로 유명했던 나라이지만 자기 제품엔 자기 나라 명칭을 붙여야지.


※ 이탈리아산 ‘스파게티’와 한국산 ‘김치’

서부개척사가 주된 역사였던 미국은 서부영화(Western movie)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역사가 긴 나라라면 건국 초기 이야기가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없지만 미국은 영화산업이 크게 발달하기 불과 백 수십 년 전에 건국한(1776년) 나라이고 차근차근 영토를 확장하며 그 커다란 국토를 이룰 즈음에는 이미 영화라는 매체가 탄생해(1895년) 있었다. 그러니 서부영화는 일종의 시대극 영화인 셈이다. 특히 1940년대 즈음부터 더욱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인기 높은 ‘남의 나라’ 사극 장르를 빌려와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황야의 무법자>(For a Few Dollars More)이다. 미국식 서부영화와는 색깔이 너무나 다른 이 영화는 큰 주목을 받아서 이후 3부작으로 제작되었는데 주연 배우는 모두 미국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맡았다.

레오네의 서부극 3부작은 “야만적인 서부개척사를 미화한 미국의 서부영화보다 더 사실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렇듯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서부영화는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분류되었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www.imdb.com)에는 전 세계의 수많은 영화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제3부인 <속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는 방문자 투표에서 최상위권으로 꼽혔다. 또 다른 국내 개봉 제명은 <석양에 돌아오다>이다.

이 3부작의 성공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은 유행처럼 만들어졌고, 심지어 ‘본국’이며 서부영화의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흉내를 냈다. 거물급 배우에 거대 자본을 들여 스파게티 웨스턴을 따라한 것이다. 그즈음 만들어진 할리우드의 서부영화는 기존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싹 사라지고 음산해졌다.

그러자 이탈리아 영화계에서는 다른 장르에서도 미국 진출을 노리고 제작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난번 지크프리트 편에서 말한 2차 대전 배경의 전쟁영화이다. 주인공은 미국인이지만 미국이 그토록 내세우는 애국심이나 군인정신 같은 것은 간 데 없고 범죄자이며 주로 보물 따위를 찾아다니는 내용이 많다. 서부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다.

그밖에 공포 장르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낸 이탈리아 감독이 있는데 그가 다리오 아르젠토이다. 꽤나 큰 인기를 얻어 한국에도 소개된 <서스페리아>(Suspiria)는 유럽의 전통 깊은 발레 학원을 배경으로 줄거리가 전개되는데 주인공은 미국인이다. 미국 여학생이 그곳으로 발레를 배우러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국 시장을 노려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흥행에 크게 성공하자 곧 전작이었던 <Deep Red>가 <서스페리아 2>라는 가짜 제목을 달고 개봉된다. 그런데 이미 그때부터 미국 시장을 노리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배경은 유럽이지만 미국인이 주인공이고 대사도 모두 영어로 되어 있다.

이렇듯 이탈리아 영화는 미국식으로 포장해 제작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런데 왜 꼭 미국 시장을 노린 이탈리아 영화를 ‘스파게티’라고 표현할까? 이탈리아에서 만든 영화는 모두 스파게티 영화 아닌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한국 영화를 ‘김치 영화’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외국(특히 미국) 무대에 나가서 활동해야 ‘김치’로서 차별화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김치 지아이’라는 말이 쓰였는데, (주한)미군에 속한 한국계 교포를 가리킨 것이다. ‘GI’는 미군 병사를 의미한다. 일반적인 한국군 병사라면 ‘김치 병사’(크학학!)라고 부를 일이 없다. 어차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김치를 먹는데 굳이 특정인을 구분할 필요가 있나?


독일제 차량에 북유럽 신화 등장인물 이름을 붙였으니 이탈리아 것에는 남유럽(로마) 신화의 이름을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고대 라틴어(로마어)와는 어미가 달라진 이탈리아어는 그리 카리스마가 느껴지지 않는다.

“본 조르노!”(이탈리아어) “봉 주르!”(프랑스어) “구텐 탁!”(독일어) “굿 데이!”(영어)

이탈리아어는 경쾌하고 귀엽다는 느낌이 든다. 온통 모음(주로 o, i)으로 끝나는 어미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예로 <글라디에이터>의 주인공 이름이 ‘막시무스’가 아니라 ‘막시모’(마시모?)라면 좀 깨지 않는가? 그 상대역인 코모두스 황제는? 코모도가 되는데, 이건 왕도마뱀이잖아! (크학학!) 베니토 무솔리니(독재자), 로베르토 베니니(영화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배우), 자코모 푸치니(작곡가), 엔초 페라리(슈퍼카 개발자) 등등 대체로 발음이 귀엽다. 예전에는 한국에서도 종종 이탈리아의 경쾌한 대중음악이 크게 유행했는데 들어 보면 참 깜찍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존재들 이름을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어찌 표기하건 세상에 알려진 ‘오리지널’ 그대로 쓰기로 했다. 이왕이면 좀 많이 알려진 인물로.

처음에는 신이 아닌 인간 이름으로 하려 했는데 로마신화에서 유명한 인물이 누구지? 그리스신화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건 좀……. 유일하게 떠오른 인물은 울리세스(Ulysses; 혹은 울릭세스, Ulyxes)였는데 영 발음이 깬다. 영어 발음은 훨씬 세련되어서 율리시즈이고 그리스 신화의 오디세우스를 말한다. 또한 울리세스라고 하면 누구인지 잘 알지도 못한다. (로마신화는 그리스신화의 영향을 받고 일치하는 부분도 많지만 다소 혼선을 빚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신의 이름에서 따오기로 했다. 유명한 신들은 주로 태양계에 포진해 있으니 쭉 훑어보았다. 맨 먼저 떠오른 것은 명왕성인 플루토이다. 그런데 너무 흔히 쓰여서 가치가 떨어진다. 마치 이웃집 개 이름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크학학!)

목성인 주피터는 어떨까? 로마식 발음으로 유피테르? 어감이 약하다. 영어식으로 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신들의 왕초임에도. 그럼 다른 이름으로! 태양계 안쪽부터 행성 순례 여행을 떠나 보자. 메르쿠리우스(머큐리=헤르메스=수성), 너무 길고 발음이 매우 구리다. (크학학!) 베누스(비너스=아프로디테=금성), 이건 발음은 괜찮은 편이지만 미의 여신이라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 마르스(아레스=화성), 역시 발음이 좀……. 유피테르(주피터=제우스=목성)는 이미 물 건너갔고, 사투르누스(새턴=토성), 우라누스(천왕성), 넵투누스(넵튠=포세이돈=해왕성), 어째 영……. 플루토(=하데스=명왕성)도 이미 했고…….

※ 우라누스의 영어식 발음은 ‘유어레이너스’인데 이렇게 들리기도 한단다. “You're an ass!” (넌 똥꼬다! 크학학!)

결국 위성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 미란다, 야페투스…… 해왕성의 가장 큰 위성은 이름이 뭐더라? 트리톤.

문득 명왕성의 위성 카론에 주목했다. 카론은 때로 명왕성 자체보다 더 신비로움을 풍긴다. 지구의 위성인 ‘달님’은 위성치고는 매우 큰 것으로 유명하다. 모행성과 크기가 어울리지 않는다. 목성의 주요 위성들은 달님보다 크지만 목성의 덩치에 비하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러니 달님은 특이한 경우인데, 명왕성의 위성 카론은 비율적으로 그 이상이다.

애초 명왕성 자체부터가 신비의 대상이었다. 태양계의 행성들을 죽 살펴보면 화성까지는 그 바깥쪽에 자리한 ‘목성형 행성’들에 비해 훨씬 작은 편이며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 비해 목성부터는 매우 크고 주로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맨 바깥쪽에 있는 명왕성은 저 혼자 작은데 지구의 달님보다도 작다. 거기다 위성인 카론의 지름은 그 절반 크기에 달한다. 이러니 명왕성과 카론은 신비로움의 대상이었다. 평소 가장 접하기 힘든 이름임에도 오히려 보다 자주 듣는 위성들보다 더 쉽게 이름이 떠오른다. (목성의 4대 위성은 제외!) 그 이름을 따다 쓰기로 했다. 어감도 괜찮다.

알다시피 명왕성은 2006년에 행성의 자격을 잃고 왜소 행성(dwarf planet)으로 강등되었고 이름마저 빼앗기면서 그저 번호로 불리게 되었다. 위성인 카론도 물론이다. 그러나 그러건 말건 내가 디자인한 차량에 붙이는 이름은 어차피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론은 저승을 흐르는 강 스틱스의 뱃사공 이름이다. 아직 명왕성에 탐사선을 보내기 전, 완전한 베일에 싸여 있을 때 카론에 대해 느끼던 신비로움을 생각한다면 설사 강등이 되었다 해도 그 느낌은 영원하다.


 드로잉
 


일반적으로 궤도차량은 앞쪽에 기동륜이나 유동륜이 있어 궤도가 아래쪽으로 경사를 그리지만 카론은 그냥 맨 앞의 바퀴부터 지면을 달리도록 되어 있다. 궤도가 사다리꼴을 그리는 이런 형태는 결국 예전에 L H Lee 님이 제시한 건탱크의 궤도와 비슷하게 되었다. 당시 그 제의를 받아들여 디자인했던 카산드라는 궤도가 좀 모호한 형태였다. 사다리꼴 궤도로 수직 장애물을 오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여서 중간 높이에 유동륜을 설치한 것이다. 카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각적인 면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이번 역시 기초적인 측면 형태를 잡은 뒤 정면도도 함께 그리면서 전체적인 틀을 잡아 나갔다. 처음에는 차체 윤곽선 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 일단 사이드스커트(이하 ‘스커트’)가 차체를 거의 가린 형태로 했는데, 앞쪽에 유동륜이 없고 높은 곳에 지지롤러(궤도 위쪽을 받치는 조그만 바퀴)가 있어 궤도가 차체 높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런 스마트한 차량은 측면에서 궤도가 드러나면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궤도 윗부분 전체를 스커트로 가려야 했는데, 그런 형태로는 미적인 디자인이 나오기 어렵다. 따라서 처음에는 스커트와 차체의 윤곽선 흐름을 잡는 데에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런데도 별 진척이 없다.

그래서 정면도부터 틀을 잡기로 했다. 초기의 트래클은 측면 형태에 치중하다 보니 정면도가 볼품없었다. 신생대 말기에 개발한 카산드라는 훨씬 나아졌지만 복잡한 구조 때문에 좀 조잡스럽게 보였다. 그 뒤를 이은 지클린데는 다시 초기의 트래클처럼 정면도가 평범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정면도를 먼저 만들어 나갔다. 이전의 모든 트래클처럼 측면의 선이 수직이 되지 않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일단 측면이 수직이 되면 세부를 아무리 잘 꾸며도 전체적인 윤곽선이 볼품없다. 그렇게 정면도의 틀을 어느 정도 만들자 측면도가 절로 떠올랐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정면도에서 측면의 흐름을 복잡하게 하다 보니 이번에는 반대로 측면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스커트가 너무 넓적해서 허전하게 보이는데 이런 것은 적당한 분할선으로 변화를 주어야 한다. 전에도 몇 번 언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면도를 따르자면 측면에 각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분할선을 쓰면 어울리지 않는다.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그래서 분할선이 없이 복잡한 각만 있는 것으로 작업했지만 더 이상해진다. 일단 스커트가 너무 크고, 측면을 거의 다 가린 점부터 미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계속 연구하다가 각과 분할선을 일치시켰다. 중간 높이 부분 하나만 빼고.

3년 전에 디자인 후기에서 말한 바 있는데, 각진 부분의 선을 어둡게 하면 분할선으로 보이고, 밝게 하면 철판을 구부렸거나 혹은 용접으로 이음매를 완전히 없앤 것처럼 보인다. 되도록 전자는 많이 쓰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전자가 훨씬 많다. 따라서 트래클치고는 너무 투박하게 보이지만 스커트가 이토록 넓적한 차량이니 어쩔 수 없다. 중장갑 차량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보기에는 좋다.

다음 문제는 궤도 라인 설계였다. 신생대 당시에 궤도 디자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하지 않다 보니 나도 까먹었다. 말이 나온 김에 모처럼 복습해 보자.

궤도 디자인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맨 앞과 맨 뒤의 바퀴를 궤도가 감고 돌아가는 부분이다. 각각의 궤도 낱장과 바퀴가 잘 맞으면서 부드럽게 넘어가게 하려면 고등수학(크학학!)이 아닌 가장 기초적인 초등 수준의 수학(기하학)이면 충분해서 원주율 개념만 알면 된다. 문제는 응용이다. 특히 당시에도 말했듯이 바퀴의 지름과 궤도 길이, 그리고 궤도 두께의 관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

궤도 연결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싱글핀: 궤도 낱장 앞뒤에 연결용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어 궤도 두 개를 이은 뒤에 핀을 박는 방식

더블핀: 궤도 낱장 앞뒤에 핀 끝이 양옆으로 나와 있고, 궤도 두 개를 이은 뒤에 구멍이 두 개 뚫린 연결기(일명 ‘돼지코’)로 연결하는 방식

이 두 가지 방식은 손목시계의 금속 줄에서도 볼 수 있다. 양옆이 매끈한 게 싱글핀이고 마디마다 연결 부위가 돌출한 것이 더블핀이다. 요즘은 더블핀 시계줄이라도 연결기가 양옆이 아닌 안쪽에 자리한 것이 많다. 전차의 궤도 역시 양옆의 연결기 외에 중앙에도 또 하나의 연결기가 있다.

앞뒤 바퀴의 곡면을 궤도가 부드럽게 감싼 형태를 그리는 데는 더블핀 방식이 쉽다고 말한 바 있다. 바퀴에 닿는 궤도면이 꺾이는 지점이므로 지름을 계산할 때 바퀴 지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싱글핀 방식은 연결핀을 중심으로 꺾이는 까닭에 그곳이 궤도의 중심점이 되고, 따라서 바퀴에 닿는 궤도면에서 핀 중심까지의 거리를 추가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곡면의 지름을 알아내면 궤도 낱장들이 꺾이는 각도를 계산해야 한다. 3년 전에 ‘강좌’씩이나 했던 나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 까먹었다. 그런데 잠시 들여다보다 보니 곧 떠올랐다. 하긴, 내 스스로 개발한 계산식인데 아주 까먹을 리는 없다.

1. 바퀴 반지름(혹은 궤도 핀까지의 거리 추가)에서 원주를 계산한다.

예) 56(지름) * 3.14 = 175.84 (반올림해서 176)

2. 얻어진 원주 값을 궤도 낱장 길이로 나눈다. 이때 싱글핀은 서로 맞물리므로 앞뒤 핀 구멍의 간격이 길이가 되고, 맞물리지 않는 더블핀은 그 자체 길이 그대로이다.

예) 176 / 11(낱장 길이) = 16 (바퀴를 감싸는 궤도 개수)

3. 360을 궤도 개수로 나누어 각도를 얻어낸다.

예) 360 / 16 = 22.5



궤도 낱장의 경사각을 구하는 방법


이렇게 해서 두 장의 궤도를 연결한 뒤에, 핀을 회전축으로 하여 하나를 22.5도 회전시킨다. 그렇게 하나씩 작업해 나가려면 너무 오래 걸리므로 연결한 두 장을 복사해 앞과 같은 방식으로 회전시키되, 2장이므로 45도 값을 준다.

더블핀의 경우는 굳이 각을 계산할 필요 없이 그냥 한쪽 끝을 축으로 회전시켜 궤도면과 바퀴가 맞닿게 해도 된다. 그래서 처음에 디자인한 궤도차량들은 까다로운 계산을 피하기 위해 모두 더블핀을 사용했다. 다만 시각에만 의존해 작업하다 보면 어딘가 어색해질 수도 있으므로 각을 계산하는 편이 낫다. 그렇다 해도 싱글핀보다는 작업이 수월하다. 싱글핀은 연결되는 궤도 낱장들의 핀을 정확히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전에 한 번 다루었던 계산식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번에는 두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첫째는 모처럼 계산을 하자니 골치가 아프다는 것인데 특히 기동륜 쪽이 그렇다. 전에 말했듯이 기동륜의 톱니 개수는 소수점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톱니 수를 먼저 정하고 거기에 맞춰 기동륜 지름과 궤도 규격을 정해야 하는데 오랜만에 하자니 그게 귀찮다. 또한 궤도 낱장을 새로 그리려면 귀찮아서 기존의 것을 따다 쓰려 하는데 그러면 반대로 기동륜을 거기 맞추어 설계해야 한다.

그래서 기동륜에 톱니가 없는 쪽을 택했다. 대신 두 장의 기동륜 사이에 칸막이가 있어 궤도의 중앙가이드가 거기에 걸려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속주행 차량에 중앙가이드가 높으면 혹시나 마찰이 너무 심하거나 걸림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까 싶어 중앙가이드만 새로 낮게 그렸다.

두 번째 문제는, 유동륜이 따로 없고 궤도가 1번 보기륜을 감고 돌아가기 때문에 앞쪽 위아래 궤도가 만드는 각이 너무 좁은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유연한 재질의 띠도 아니고 체인도 아닌, 널빤지 형태의 금속 조각들이 연결된 것이라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별 문제도 아니었다. 현대 독일군이 사용하는 소형의 다목적 궤도차량을 보니 뒤쪽에 유동륜이 따로 없어서 역시 좁은 각을 만들고 있었다.

앞바퀴의 완충장치를 색다르게 하고 싶었다. 궤도차량은 굳이 4륜구동일 필요가 없지만 애초 암으로 앞바퀴를 구동하는 4륜구동 차량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린 까닭에 맨 앞바퀴는 따로 놀고 있다. 따라서 아예 차체에 연결된 보기암에 매달린 게 아니라 스커트에 붙어 있는 것으로 할까 했다. 내친 김에 모든 보기암이 스커트에 붙어 있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차체가 무척 작다는 문제가 좀 더 해결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문제가 있었다. 큰 정비를 하려면 온갖 기계장치가 붙어 있는 양쪽 스커트를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야전에서는 정비가 어렵다. 따라서 그 방식은 포기하고, 중간의 보기륜은 모두 일반적인 궤도차량처럼 보기암에 의해 뒤쪽 위로 오르내리는 것으로 하되, 차체보다 앞으로 나간 1번 바퀴만 앞으로 오르내리는 것으로 했다.

앞바퀴 바깥쪽에는 별 의미도 없으면서 이전에 디자인했던 카산드라처럼 불룩 튀어나온 드럼을 달았다. SF 바이크의 영향인데, 카론은 앞바퀴가 차체보다 더 앞으로 나와 있는 까닭에 안쪽에까지 드럼을 연장시켜 보다 색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 드럼 덩어리의 용도는 나도 모른다. (크학학!)

그렇게 드로잉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즈음 서울에 사는 후배가 찾아왔기에 디자인을 보여 주었다. 사다리꼴을 한 궤도 앞쪽의 기능성에 대해 어떠냐고 묻자 아무래도 문제가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핑계거리를 만들었다. 평소에는 주행성을 위해 1번 바퀴가 지면을 달리지만 수직 장애물을 만나면 위로 올릴 수 있다. (짜잔! 이런 말도 안 되는! 근데 정말 말도 안 될까?)

덕분에 아무런 쓸모도 없이 앞바퀴 양옆에 붙여 놓았던 드럼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드럼에 유압 장치가 들어 있어 암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계(차량)는 당연히 본체의 장치가 작동해 외부 장치를 움직인다. 그런데 이 차량은 반대다. 그만큼 차체 공간을 절약할 수도 있다. 또한 차체 내에서 비롯된 동력을 거기까지 보내는 복잡함과 공간 낭비도 줄어든다. 멋으로 달았던 장치가 오히려 더 효율적인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스커트에서 앞바퀴를 향해 뻗은 암처럼 생긴 부분은 애초 별 의미가 없었다. 또한 처음에는 스커트가 연장된 형태로 되어 있었다. 스커트가 궤도를 싹 가리면 영 볼품없기도 하지만 운전자의 측면 시야를 가리므로 윗부분만 트이게 한 것이다. 또한 앞쪽 궤도가 그리는 경사 정도는 보여 줘야 궤도차량 특유의 매력이 살아나고, 한편으로는 애초 앞으로 암이 길게 뻗은 차륜차량 디자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부분까지 스커트와 일체인 것으로 하자 너무 변화가 없고 조잡스럽게 보였다. 따라서 스커트에서 분리하여 별도의 장치인 것으로 했다. 그 부분을 작동하는 암처럼 보이도록 좀 더 기계적인 모습으로 그릴까 했지만 그러면 전체적으로 스마트한(정말?) 형태와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디자인하는 내내 몇 번이나 갈등하다가 작동 부위는 그 안쪽에 가려진 것으로 했다. 그때만 해도 그저 완충장치의 성격이었다. 그런데 앞바퀴를 오르내릴 수 있는 쪽으로 설정하자 단순한 완충장치가 아니라 보다 특별한 작동 장치가 되었다.

처음에 앞쪽의 암이 움직이는 것으로 설정했을 때는 바퀴 옆의 드럼과 일체가 되어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저 암을 보호하는 고정 부위로 바꾸자 드럼과는 분리하게 되었다. 이런 점도 과거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9년 여름 신생대 초기에는 바이크들을 디자인했다. 미래적으로 보이도록 둥근 커버가 앞바퀴를 감싼 것으로 했다. 그 커버는 카울링의 연장 부분과 일체다. 나중에 생각하니 문제가 있다. 그럼 바퀴는 어떻게 위아래로 움직이지? 결국 바퀴는 둥근 커버와 따로 노는 꼴이 되었다. 이 얼마나 꼴불견인가. 커버가 둥근 것은 역시 둥근 바퀴와 매치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커버를 벗어나 따로 논다면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 실수를 한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는 드럼 부분과 암 커버가 분리된 것으로 처리했다.

스커트가 복잡한 각을 갖고 있고 앞바퀴 드럼까지 듬직해지자 정면도는 더욱 멋있어졌다. 아예 로봇처럼 보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점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칫 애니메이션의 메카닉처럼 생각할까 싶어서. 그러나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이런저런 산업 분야 경험에 오랜 세월 쌓인 전투차량 감각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것이니까.

그나저나 기존의 트래클보다 더 작은 이 차량에 무기는 어디에 달지? 전에도 종종 멋으로 위쪽에 장착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칫 ‘진짜 만화’처럼 될까 싶어 금했다. 차체 앞쪽 아래 경사면에 달면? 그러면 적의 몸통이 아닌 다리만 겨우 맞힐 뿐이다. 또한 다리는 몸통보다 가늘어서 명중률도 그만큼 낮다. 그래서 스커트 옆쪽을 고려해 봤지만 그러면 폭이 너무 넓어져서 그만큼 좁은 곳을 통과하기 어렵다. 궤도 위쪽의 스커트 공간을 활용할 생각도 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생각!

‘또 전조등을 달지 않았다!’ (크학학!)

이상하게도 트래클은 설계할 때마다 전조등을 빼먹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전조등은 차체 앞쪽 양옆에 달까 했지만 자칫 어설프게 보일 수 있다. 기껏 앞쪽에 공기역학적(?) 디자인을 했는데 분위기를 깬다. 앞쪽 아래 경사면에 달까? 그럼 독특할 것 같은데? 하지만 너무 낮아서 조명 범위가 좁아질 듯하다. 결국 양쪽 스커트 위쪽에 달기로 했다. 그 작업을 하다 보니 기관총의 해결책도 찾았다. 전조등과 나란히 다는 것이다. 그러면 만화 냄새도 덜 나고 야간 조준에 있어서도 효율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렇게 했다.

카론이 기존의 트래클보다 작다고 말했는데 그 수치를 비교해 보자. 맨 처음에 디자인한 워혹은 보다 큰 편이었고(길이 382, 높이 172센티미터) 이후 SF 분위기를 도입한 카산드라(길이 390, 높이 147)와 지클린데(길이 391, 높이 151)는 궤도가 차체 밖으로 벗어나면서 훨씬 낮아졌다. 카론은 보다 작은데(길이 360, 높이 135) 더욱이 전체 길이의 상당 부분은 앞으로 쭉 나간 1번 바퀴에 의한 것이므로 실제 차체는 더 작다. 여기에 운전자와 온갖 장비를 넣어야 하니 더 어려웠던 것이다. 건탱크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다 보니 높이가 꽤 낮아져 그만큼 피탄(避彈, 적탄을 피함) 효과도 높아졌지만 무엇보다도 무게 중심이 낮아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카론과 인체 크기 비교


모든 차량을 디자인할 때면 이렇게 인체 모형을 옆에 놓고 크기를 비교한다. 인체는 계산이 쉽도록 키가 180센티미터인 것으로 설정했다. 트래클 같은 소형 차량을 그릴 때는 인체를 180픽셀로 해서 암산이 쉽지만(1픽셀=1센티미터) 중형 정도의 차량에서는 160픽셀로 하기 때문에 좀 더 계산이 까다로워진다.

차체 및 부속물 규격 × (180 / 160)


 페인팅  


카론은 지금까지 내가 디자인한 것 중 입체감 표현에 가장 애를 먹은 차량이다. 넓적한 스커트 때문에 드로잉 때부터 문제였지만 명암을 부여하는 것도 혼란스러웠다. 실물을 보고 그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설정해서 빛의 각도, 그리고 거기 따른 명암을 부여해야 하니까.

가장 큰 변화는 패널라인에도 희미하게 광택을 넣었다는 점이다.

전에 디자인 후기나 강좌에서는 패널라인은 그저 두 판이 만나는 자리이므로 언저리에 때가 낀 것만 표현한다고 했다. 그런데 카론은 복잡한 스커트의 각 때문에 보다 두툼하게 보였고, 한편으로는 커다란 패널라인이 많아서 질감이 입체감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상쇄하려면 더욱 입체감을 부여해야 한다. 결국 패널라인에도 광택을 넣었는데 각이 져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각이 없는 아래쪽 패널라인들은 상대적으로 허전하게 보였고 질감이 강하게 보이는 착시를 일으켰다. 그래서 거기에도 희미한 광택을 넣었는데, 그만큼 약간씩 불룩한 느낌을 보인다. 정비를 하기 위해 스커트 아래쪽은 경첩에 의해 접을 수 있는데, 처음에는 이 경첩이 돌출해 있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미끈한 차체에 어울리지 않아서 스커트와 동일면에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좀 허전해 보인다. 입체감을 중시하지 않았을 때라면 그럴 일이 없었지만 특히나 입체감을 많이 부여한 이 차량에서는 특히 그 문제가 두드러져 보였다. 그렇다고 그 작은 부품들까지 일일이 패널라인을 그리면 더 지저분하게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돌출부가 아님에도 약간씩 광택을 넣었다. 워낙 희미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없을 때와 비교하면 느낌의 차이가 크다.

정면도의 명암 작업은 더욱 어려웠다. 이전의 차량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네모진 상자 모양에서 벗어나 차체 앞쪽 양옆에 각을 주었다. 그런데 그 각이 약간의 곡면으로 되어 있어 드로잉에서 선을 그릴 수 없다. 따라서 페인팅 작업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명암으로만 인지시켜야 하니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차체 앞부분이 기본적으로 여섯 개의 각으로 되어 있고, 운전석 부분 때문에 보다 많은 각을 만든다. 또한 맨 앞쪽도 날카로운 각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면이다. 그 바람에 이번에는 앞쪽의 명암 레이어만도 일곱 개나 필요했다. 그냥 칠을 한 게 아니라 ‘흐리게’ 효과를 주고 저마다 투명도를 다르게 해서, 만약 합쳤다가는 나중에 하나의 면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경우 또 애를 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워낙 각과 시각 방향의 경사가 많아서 원근감이 제대로 살지 못했고 추가 레이어도 몇 개 사용했다. 기본적인 명암 레이어가 가장 많이 들어간 그림이 되었다.

차체 명암 작업이 끝나자 나머지는 간단했다. 처음 그려 보는 사다리꼴 궤도 정면도는 경험이 없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일반적인 궤도차량보다 원근감 표현이 쉬웠다. 일반 궤도차량은 위쪽에 기동륜이나 유동륜이 있고 아래로 경사를 그린다. 그 바퀴 위쪽(위에서부터 1/3 정도 위치)을 중심으로 빛(흰색)을 주고 아래쪽은 곡면에 따라 점점 어두워지다가 직선으로 이어진 부분들은 같은 명도(검은색)로 한다. 그러나 시각적으로는 그런 원근감이 제대로 살지 않아서 한참 애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사다리꼴 궤도는 쉽게 원근감을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작업을 해도 허전한 구석이 있다. 얼룩무늬도 없고 마크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웨더링을 한 것도 아니고. 2010년 초에 신개념 트래클을 디자인하기 시작한 뒤로 웨더링을 피한다고 몇 번 말했다. 순수하게 그 디자인 자체만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카산드라나 지클린데는 정면도를 드로잉 선에서만 끝내고 그냥 두었다. 카론이 최초의 정면도 완성작인데 처음으로 그 허전함을 알아차린 것이다. 차라리 입체감을 덜 살렸다면 마크나 웨더링이 없어도 덜 허전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측면에 붙은 회사명과 제품명을 또 정면에 붙이면 ‘명품’ 가치가 떨어진다. 나이키 운동화 앞쪽에까지 나이키 로고를 크게 넣으면 안 되지. 잠시 생각하다가 모토베르디의 약어로 ‘MV’를 궁리했고, 그것만으로는 허전해서 ‘sport’라는 단어까지 추가했다. 전체 분위기와 집중적인 명암 작업에 비하면 조촐한 듯하지만 그 하나가 변화를 주어 허전함을 달랬다. (하지만 나중에 위장무늬를 넣으면서 그 로고는 없앴다. 위장무늬를 넣은 이유는 나중에 설명한다.)

카론의 정면도



※ 경사면의 명암 부여에 있어 새로운 관건

3년 전에도 원근감을 살리기 위한 명암 얘기를 많이 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조명은 관찰자 시점으로 왼쪽 위에 있는 것으로 한다.)

1단계. 원근감에 신경 쓰지 않을 경우 위쪽이나 왼쪽으로 경사가 클수록 밝게(흰색을 칠하고 투명도 조절) 한다.

2단계. 그러나 밝은 부분이 가까워 보이는 경향이 있어 때론 검은색을 덧씌우되 투명도를 알맞게 조절한다.

3단계. 경사면은 원근감을 살리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따라서 ‘흐리게’ 기능을 사용하여 앞쪽은 밝게, 멀어질수록 어둡게 처리한다.

문제는 모순이었다. 위쪽으로, 뒤쪽으로 갈수록 경사각이 커지는데 원근감 때문에 더 어둡게 한다? 그래서 밝기를 약하게 한다기보다는 어두운 색을 겹친 것이다. 빛의 반사가 생기면 실제 색과 다르게 보이는데, 경사각이 큰, 즉 더 밝아야 할 부분이라도 어두운 색까지 겹치면 그만큼 색이 더 달라져서 사실감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다.

당시 나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보다는, 그 물체의 실제 형태로 보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명암의 모순은 이번에도 겪다가 특히 각이 많은 카론에서는 좀 더 깊이 파고들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답을 찾았다! 빛이 위쪽에 있는데 경사가 그리 크지 않은 앞쪽이 더 밝게 보이고, 또한 원근감 때문에 경사면의 먼 쪽을 어둡게 하는 것은 사실성과 관련이 있을까?

차량이나 건축 도면들은 원근법을 쓰지 않아서 거리에 관계없이 비율 그대로 보인다. 여기에 명암으로 원근감을 넣을 때, 가장 기초적인 1단계 방식을 쓰면 멀리서 망원경으로 본 것과 같다. 수백 미터 거리에서 보면 길이 몇 미터짜리 차량의 원근감은 무의미하다. 경사면의 반사광도 일정하다. 즉 원근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맨눈으로 차량이 꽉 차 보일 정도인 몇 미터 정도 거리에서 볼 경우 당연히 원근감이 확연해진다. 그러나 도면처럼 그리는 이런 일러스트에서는 원근감이 없는데, 명암에는 원근감을 주어야 한다. 즉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인 셈이다.

그렇다면 경사면의 먼 쪽은 실제로 어두울까? 잘 생각해 보니 조명의 각도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단 거리가 멀수록 반사각이 커져서 거울처럼 매끄럽지 않은 이상 빛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 둘째, 초등학교 과정에서 배우는 조도(조명도)가 답이다. 지금도 기억하는(!) 조도의 기본은 다음과 같다.

1. 1캔들 = 촛불 1개의 밝기

2. 1럭스 = 1미터 거리에서 본 1캔들의 밝기

3. 거리가 멀어지면 조도는 그 제곱으로 약해진다.

물론 태양처럼 먼 곳에서 오는 빛은 이런 단거리에서는 조도 차이가 무의미하다. 그러나 반사광이라면 빛은 그 반사된 물체에서 출발한 셈이므로 얘기가 다르다. 난반사일 경우 시점 방향에 대한 각이 커질수록 빛이 많이 산란되어 그만큼 어두워진다.

대충 이렇게 정리하자 역시 거리가 멀수록 어둡게 표현하는 게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조명에 대해 직각에 가까울수록 밝은 것은 사실이므로, 가장 사실적인 표현은 그만큼 밝게 칠하되 거리에 따라 어두운 색으로 조절을 해 주는 방식이 맞다. 단, 모든 부분을 그렇게 작업하려면 레이어가 너무 늘어날 수도 있으므로 그냥 흰색 번짐만으로도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카론 정면도에서는 조명을 제대로 받는 궤도 위쪽 경사면이 더 어두운데 그렇게 하자 원근감이 잘 나타났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조도에 대한 뇌억력의 정확성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틀린 건 없다. 그런데 얼마쯤 차이는 있었다.

첫째, 캔들이라는 단어는 칸델라(candelaar; 포르투갈어)로 바뀌어 있다.

둘째, 칸델라의 개념이 촛불의 밝기가 아니라 좀 더 복잡했다. 그렇다면 당시 교과서에서 배운 것은 편의상(?) 좀 간략화한 듯하다.



뒤이어 위장무늬 얘기를 썼는데 손을 보다 보니 웬 잡담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크학학!) 별도의 게시물로 나누어 올리기로 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뇌억력에 의거해 쓴 부분이 많다. 따라서 오류가 보이면 지적해 주시고, 넓디넓은 뇌주름으로 오해(!)해 주시라! (크학학!)

by 뇌의가호 | 2013/01/29 15:11 | 메카뇌즘 Mechanoes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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