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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클 카론과 함께 하는 위장무늬 이야기

주제: 위장색의 개념, SF의 기능, 문명 성찰, 위장 패턴과 확률론


애초에는 앞에 올린 고기동 궤도식 강습차량 ‘카론’ 디자인 얘기에 이어졌던 것이었는데, 몇 차례 손을 보면서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별도로 올리게 되었다.


 위장무늬에 대하여  


카론 바로 앞에 디자인했던 지크프리트는 가장 단순하고 어설픈 위장무늬를 그렸다. 아무리 독특한 차량을 디자인한다고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제3세력인 ‘구국단’은 뒤늦게 생겨난 세력인 까닭에 많은 점에서 미비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유의 위장 패턴도 없다.

그런데 이어 지클린데의 입체감 작업을 마무리하고 카론까지 그리다 보니 위장무늬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청년의 군복을 잠시 살펴보다가 한국군의 ‘디지털 위장무늬’ 도입을 다시금 생각했다.

전에 개마 장갑전투차 후기에서 말한 바 있지만 군용 위장색의 목적은 우리의 뇌에 박힌 협의의 위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어린 시절에 동물들의 보호색에 대해 배우고, 군대에서도 “적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강조하기에 위장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눈에 띄더라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때도 말했지만 엉뚱하게도 그런 사실은 과학 월간지 <사이언스> 앞부분의 뉴스 모음을 통해 알았다.

그 기사는 기존 미군 차량의 우드랜드 위장보다 나토 3색 위장이 효과적이라는 내용이었다. 꼭 ‘은닉’만이 아니라 눈을 혼란시키는 것도 중요한 이유는 차종을 알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일단 정찰병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전투 부대가 적을 발견했을 때에도 사용할 전술이나 무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로 철갑탄으로 화물 트럭을 공격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짓이고, 전차에 고폭탄을 쓰는 것도 유효하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얼룩무늬가 눈을 혼란시켜 조준을 어렵게 한다. 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양궁 경기에서 과녁에 얼룩무늬를 칠해 놓는다면 어떨까?

지금도 한국 육군 차량이 사용하는 우드랜드 위장은 암록색과 갈색이 큼직큼직한 부정형의 형태로 어우러지고 거기에 버프(옅은 황토색)와 검은색의 ‘띠처럼’ 가늘고 자잘한 무늬가 들어간다. 현지에서 페인트를 구입해 칠하는 부대들은 버프 색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푸른빛이 감도는 회백색에 가까웠고, 광택까지 나서 위장은커녕 오히려 돋보일 정도였다. 띠의 굵기에 변화가 없고, 끝부분들을 예리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어두운 검은색이나 버프처럼 밝은 색은 아마도 복잡한 지형지물과 수목 틈새로 보이는 그늘 혹은 반사광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띠들의 굵기가 일정하고 끝부분이 두루뭉술하니 척 보기에도 인위적인 느낌이 나는 것이다.

미군이 나토 3색으로 바꾸었음에도 한국군은 따라서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말 그대로 나토 가입국 공용의 위장이라 그런 듯하다. 미군만의 위장색이라면 따라하지 않았을까? 이웃한 일본군(자위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막강하지 않은가?) 사진들을 보면 군복이나 차량이나 채도가 무척 낮은 색들이 어우러져 싸구려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일본의 환경에는 그런 위장색이 가장 적합한가 보다. 어쨌든 저인시성(低認示性, low visibility)은 괜찮아 보인다.


위장색 얘기를 하니 문득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촌구석 학생치고는 무척이나 감성적이고 꿈도 많고 교양 상식도 다양, 풍부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색이 주는 감정에 대해 열띠게 설명하더니 내게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나? 이렇게 대답했다.

“다크옐로 바탕에 레드브라운이나 다크그린으로 그린 얼룩무늬.” (크학학!)

2차 대전 후기 독일군 장갑차량의 위장무늬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나는 그 위장무늬에 매료되어 전투차량을 그릴 때 꼭 독일군뿐 아니라 현대 미군 차량 등에도 그 무늬를 입혀 보고는 했다. 당시 한국군이나 미군 차량은 국방색 단색이었다. 국군의 날 행사 사진을 보면 군데군데 큼직하게 아메바처럼 생긴 무늬를 그리고 그 안에는 더 연한 색으로 무늬를 그린 패턴도 있었는데, 연한 황토색 계열이라 그리 효과적이지 않아 보였다. 국방색과 노란색(연갈색?)이 어우러진 얼룩무늬도 사진에서 본 듯한데 역시 너무 밝은 느낌이었다. 위장 효과는 그만두고라도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다.

2차 대전 초기의 독일군은 판처그라우(Panzer Grau, 일명 저먼그레이)라 불리는 칙칙한 회색으로 칠하다가 북아프리카 전투 때부터 다크옐로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그것이 아예 표준색이 되었다. 그러다가 유럽 전선에서는 다크그린이나 레드브라운 무늬가 들어갔다. 두 가지 색의 무늬를 모두 그린 것도 있는데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멋지게 보였다. 그 패턴도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져서 꽤 다양했다.

훗날 제2의 모형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매복위장이라는 것도 있다. 다크옐로 바탕에 다크그린과 레드브라운 두 가지 색으로 큼직한 무늬를 그리고, 각 색 위에 다른 색으로 반점(표범 무늬)을 그리는 것이다. 애호가 관점에서도 멋있지만 위장 효과도 좋았을 것이다.

모형동호회 활동 덕분에 보다 많은 것을 배웠는데, 가장 친한 동료는 독일군의 차량뿐 아니라 전투복 위장무늬도 매우 다양하다고 말해 주었다.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가 보여 주는 자료를 보니 그 이상이었다. 무장 친위대의 경우 얼룩무늬에 점박이 무늬가 겹쳐진 군복을 입었는데 그것도 패턴과 색상이 여러 가지였다.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위장복을 생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국군의 경우 1990년대 들어 군복이 통일되었다. 그 이전에는 부대 또는 병과에 따라 몇 가지 유형이 있었다. 국군의 날 행사 덕분에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일단 과거의 예비군복에 대해 아는 분도 있을 것이다. 연녹색 기운을 띤 회백색에 몇 가지 색으로 나뭇잎 크기의 무늬들이 그려져 있는 이 군복은 그리 위장 효과가 없어 보였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해병대가 사용하던 위장이었는데 열대 섬에서는 어느 정도 어울릴지 모르겠다.

육군의 기본적인 군복은 국방색이고, 공수특전대는 얼룩무늬를 입었다. 그 중 일부는 앞에 말한 예비군 무늬와 비슷한 색상인데 다만 무늬 형태가 복잡했다. 가늘게 길고 구불구불하며 가지를 치기도 하고 끝은 날카롭다. 이런 패턴의 위장색은 기갑병 복장에도 사용되었다. 또 다른 공수특전대 위장색은 가느다란 미역이 복잡하게 뒤엉킨 패턴인데 이런 형식은 요즘도 밀리터리룩에서 종종 볼 수 있다.

해병대는 큼직큼직한 각진 무늬에 날카로운 무늬들이 어우러진 위장복을 입었다. 그런데 국군의 날 행사 때 심해잠수사 복장을 보니 앞에 말한 “오빤 미역 스타일!” 공수특전대 패턴과 거의 똑같은데 붉은 기운이 느껴졌다.

이 모든 위장색이 미군의 것과 비슷한 위장색으로 통일되었고 최근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 초, 예비군 훈련을 갔던 한 후배가 이렇게 지적했다.

“숲에 들어가니까 어째 얼룩무늬 위장복이 국방색 단색 옷보다 더 눈에 잘 띈다.”

4면이, 아니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산악이 70퍼센트를 차지하는 한국은 벌판이 별로 없고 온통 숲이다. 어쩌면 그런 숲속에서는 차라리 국방색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독일군 친위대의 점박이 위장복을 본 뒤로 나는 한국군 군복도 그런 패턴이 어울릴 것 같다고 종종 말했다. 대전 이후 서독 군대는 재무장을 하면서 국방색 군복을 입고 미군의 전투차량을 사용하는 등 미국식을 따랐지만 서서히 변화가 일었다. 90년대에 사진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결국 친위대에서 따온 듯한 점박이 무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산악이 많기로 이름난 독일의 그 선구적인 위장 패턴을 우리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독일에는 ‘베르크’라는 지명이 많은데 역시 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잠시 옆으로 새서(?) 궤도차량의 한 형식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군에서는 조난을 당하거나 고장 난 전차를 견인하는 차량을 ‘구난전차’라 부른다. 보다 가벼운 장갑차를 견인하는 구난장갑차라는 것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널리 배치되지 못했다. 고장 난 장갑차는 그냥 장갑차가 끌고 간다. (크학학!)

그런데 모형동호회 활동을 하다 보니 모두가 ‘회수전차’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일본 서적의 영향이다. 영어로는 ‘recovery tank’이니 (일본에서) 직역한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은 구난전차지? 일본을 통해 근대화되었고, 일제 식민시기를 겪었고, 따라서 산업 분야는 물론 예술이나 대중문화 등 온갖 곳에서 일본식 용어를 써 왔으면서.

역시 일제인(!) 이런저런 서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독일어로는 구난전차가 베르게판처(Bergepanzer)이다. 직역하면 구난전차가 된다. 즉 일본과 미국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한국이 이상하게도(?) 독일식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현대 한국군은 사실상 미국의 무기와 제도를 많이 따랐음에도. 오히려 독일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일본이었는데 적어도 구난전차 용어에 있어서는 어째 서로 엇갈렸다.

예로 1980년대에 개발된 양국의 전차를 비교해 보자. 한국군의 K1 전차는 미군의 M1과 꽤 닮았는데 실제로 미국에서 설계된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의 90식 전차는 언뜻 보면 독일의 레오파르트2 동생으로 보일 정도로 비슷하다. 전에 그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도 들은 듯한데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하다. 우스운 것은 ‘90식 전차’로 명명된 이유이다.

80년대는 온통 서울올림픽 열기로 뜨거웠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민심을 잡기 위해 온갖 수를 썼는데 그 중 하나가 서울올림픽을 떠벌리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신형 전차 K1을 ‘팔팔(88) 전차’라고 부르짖었다. 그 바람에 이웃한 일본이 애꿎게 피해를(?) 봤다. 육상자위대에 도입할 신형 전차를 88식 전차로 명명할 계획이었는데 한국군의 88 전차에 선수를 빼앗겼고, 결국 90식 전차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89식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89식은 역시 당시 새로 개발된 장갑차(보병전투차, IFV) 명칭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2차 대전 이후 일본 자위대에서 개발한 전차와 장갑차들은 매번 마치 쌍둥이처럼 나란히 제식 명칭(번호)이 붙었다. 60식 장갑차, 61식 전차, 얼마쯤 세월이 흘러 새로 개발된 73식 장갑차와 74식 전차, 덩치는 전차가 더 큰데 늘 장갑차가 형님이다. 그리고 컴퓨터가 대중화되던 시기에 보다 첨단의 제3세대 장갑차량들이 개발되었는데 또 장갑차가 형님이어서 89식 장갑차, 90식 전차로 불렸다. 나는 그게 일본‘군’의 일관된 방침 혹은 전통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이면에 숨은 진실을 알고 보니 그때는 ‘전차의 역습’(?)으로 전차가 형님이 될 뻔했다. 그런데 웬수 같은(크학학!) 88 전차 때문에 또 같은 배열이 반복된 것이다.

동해 건너의 일본군은 이미 제국주의 시대부터 모든 무기에 번호와 ‘식’을 붙여 명명했는데 그것은 서해 저편에 있는 중공군도 마찬가지다. 광복 후 미군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 한국군은 미국식 명명법을 따른다.

다시 산으로 가자!

구난전차를 뜻하는 독일어에서 보이는 ‘Berge’는 그 근원이 바로 ‘Berg’, 즉 산이다. 산이 많은 까닭에 구조(救助)를 뜻하는 말도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에도 말했듯이 떡갈나무가 상징성, 문양 등으로 쓰였던 나라다. 한국의 산에도 떡갈나무가 무성하다. 그래서 나는 오랜 노하우를 가진 독일의 위장 패턴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군은 걸프전에 참전했을 때 점박이 비슷한 위장복을 입어서 한국에서도 또 그게 크게 유행되었는데, 단순한 점박이가 아니라 반점에 그림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자갈이 깔린 사막을 염두에 둔 듯하다.

여기서 세월을 거슬러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중딩 때인지 고딩 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위장무늬에 대해 구상한 바 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화를 즐겨 그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후진국이라 문화적으로도 매우 협소하고 낙후되어 있어서 외국을 배경으로 한 만화가 많았다.

뭐야?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문화적으로 협소한데 어떻게 외국을 배경으로 만화를 그려? 아니다. 얘기를 더 들어 보자.

일상사나 역사 소재, 그밖에 6.25전쟁이 아니면 딱히 소재가 없는 까닭에 만화가들은 홍콩영화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렸던 것이다. 무협, 서부극, 2차 대전, 로마시대 등등. 나 역시 할리우드 키드인 데다 그런 만화들까지 보고 자랐으니 서부극이나 2차 대전 만화를 어릴 때부터 그렸다.

미군 특공대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그리다가 그들이 온갖 무대에 뛰어들어 활약하는 내용을 상상하고는 지형, 환경에 맞는 위장복을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위장복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기 전이었다. 전쟁영화에도 위장복은 거의 나오지 않고, 독일군이 등장해도 오직 ‘독일병정’이라 불리는 깔끔한 펠트그라우(Feldgrau; field gray) 복장들만 나왔으니까. 또한 독일군의 위장복도 제대로 알지 못하니 하물며 다른 나라 군대에 대해서는 더욱 몰랐다. 한국군이나 미군은 그저 국방색을 입었고.

따라서 당시 내가 위장복에 주목한 것은 위장복 개념이라기보다는 동물의 보호색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인간은 보호색을 띠지 못하고 카멜레온 유전자를 심을 수도 없으니 옷으로 커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상한 것이 산악, 숲 지대에 침투할 때는 나뭇잎 모양의 천 조각이 뒤덮은 위장복, 사막에서는 모래가 덮인 위장복을 입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사막 위장복을 입었다가는 적이 문제가 아니라 열기 때문에 통구이가 될 것 같다. (크학학!)

2006년쯤이었던가? 착한 삼할이하인(三割以下人), 아니 주한미군 병사의 선행을 다룬 인터넷 뉴스를 보니 군복이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건 뭥미? 바탕색이 너무 밝은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자잘한 점박이 위장이 되어 있다. 나중에 실물을 보았는데 왜 그런 위장색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현 시점에서의 주된 임무 수행 지역이 중동인 까닭에 거기에 맞춘 게 아닌가 생각했다.

2009년 겨울, 신생산시대에 접어들어 열심히 디자인 작업을 하는데 후배가 찾아와 차량의 무늬를 보더니 “대리석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군의 위장복 패턴에 대해 설명하며 ‘디지카모’라 불린다고 알려 주었다. 디지카모는 가까이서 보았을 때에도 자잘한 무늬가 눈을 어지럽히는 것이 장점이란다. 다만 다소 문제가 있어 개량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2012년 봄에는 한국군의 새로운 위장복을 처음 목격했는데 디지카모와 근본 개념은 같아 보였다. 얼마 전에 뭔가 검색하다가 우연히 알았는데 공식 명칭이 ‘디지털 위장무늬’다. 그렇다면 역시나 디지카모의 영향인데, 2006년부터 몇 년에 걸쳐 개발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연이기는 하지만 뭔가 통했다! 후배가 내 컴퓨터에서 보았던 미래적인 위장무늬는 컴퓨터로 디자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디자인을 시작할 때는 반군은 그냥 현지에서 아무렇게나 칠한 것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정부군은 도시 치안을 담당하는 미군이 썼던 도시형 위장을 물려받은 것으로 했다. (나중에 후배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시티카모’로 명명했다.)

일반적으로 위장 도색은 그 지역 환경, 즉 지형지물과 식생에 따라 달라지지만 주요 선진국, 군사 강국이 온대지방에 있기 때문에 토양과 활엽수와 수풀에 주안점을 둘 것이다. 대체로 부정형이고 선이 구불구불하다. 또한 색상은 암녹색, 갈색 등이 기본이 된다. 그러나 도시형 위장이라면 직선, 각진 형태, 그리고 회색 계통이 되어야 한다. 전에 그 얘기를 한 적 있다. 구불구불한 형태와 녹색과 갈색 계열인 일반적인 위장무늬에 눈이 익은 까닭에 도시형 위장을 하면 영 전투차량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무슨 이벤트, 혹은 퍼포먼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크학학!) 그래서 웨더링으로 때워야 했다.


다양한 위장무늬 패턴 연구 - ‘The Day of DEVA’


도시형 위장 얘기가 나온 김에 ‘돌빡’들이 지배했던 과거의 한국을 잠시 되돌아보자. 그때는 도시, 심지어 서울 한복판에도 곳곳에 군사 시설이 있었다. 그런 시설을 보면 어김없이 ‘군대식 건물 도색’이 되어 있다. 매우 옅은 초록색 바탕에 얼룩무늬를 그린 “예비군복 스타일!” 위장색이다. 그런데 그걸 위장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내 한복판에 그런 칠을 한 건물이 있으면 누가 보기에도 군사 시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한 간첩님들이 고생하지 않고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표시를 했다. 하여간 그놈의 돌빡 정권에 돌빡 군대란…….

사실 그런 얼룩무늬 도색은 적군이 아닌 국민을 염두에 두고 칠한 것이다. “여긴 신성한 군사 시설이니 감히 민간인 따위는 얼씬거리지도 말라!” 어디 건물뿐이겠는가? 보안(간첩)을 핑계 삼아 온갖 분야에서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했다. 병사들에게는 편지를 쓸 때 몇 가지 철칙이 있었다.

- 문장 부호를 사용하지 말라.

- 비유법을 쓰지 말라.

- 감정적인 표현을 쓰지 말라.

아니? 이게 편지냐? 보고서지. 로봇에게 읽히기 위한 건가? 하지만 로봇이라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문장 부호가 전혀 없으니까.

그 지침에 따른다면 60만 대군 곳곳에 간첩이 잠입해 있다는 말이 되는데, 병역 의무까지 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완벽하게 길러진 고정간첩이라면 겨우 편지의 문장 부호 따위를 이용해 연락을 하겠는가? 또한 굳이 군사우편을 이용할 일이 무엇인가. 그냥 외출외박 나가서 그림까지 그려 가며 상세하게 쓰면 되지. 아니, 그 정도면 직접 접선을 할 것이다. 외출․외박에 한계가 있다면(내가 근무한 부대에는 정기 외출․외박이 전혀 없었다.) 가족이 면회를 오면 된다. 가족 역시, 아니 가족이야말로 오리지널 고정간첩일 게 아닌가.

사실상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많은 ‘보안’ 부분은 국민을 옭죄려고 한 수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작 군대 내부는 곪아 터져 있었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공공연하게 쓰였다.

“모든 부조리는 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문민 대통령’ 김영삼은 취임 후 군대의 환부부터 도려내지 않았는가.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군대가 확실하게 썩어 있었다는 점이다. ‘대통령 코스’로 꼭 거쳐야 하는 성역이었으니까. (당시에는 대통령이 되거나 정계로 진출하기 위해 육사를 간다는 말이 상식으로 통할 정도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는 그토록 위장을 강조하면서도 지휘관 차량을 보면 반들반들하게 칠해서 윤기가 좌르르 흐를 정도였다. 군필자 중 밀리터리 마니아들은 대화에서 그 점을 꼬집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쯤에는 모처럼 만난 후배와 대화를 하다가 군대가 얼마나 썩어 있었는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친구 아버지는 영관급 장교 출신으로 육군본부에서 수년간 근무했다. 그 친구와 만났을 즈음 마침 블로그에서 윤기가 번들거리는 군대 지휘관 차량을 비꼰 글을 쓴 적이 있어 그 문제점을 언급했다. 그러자 그 띨띨한 친구는 전혀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본부에 근무하는 장교는 일선 부대 지휘관보다 지위가 높고 입김이 세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파워’에서는 밀린다. 일선 부대 지휘관은 그만큼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 나는 군사(전술) 분야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인데 웬 권력 얘기로 흘러가 버렸다. 아마 평소에 아버지로부터 종종 들었던 얘기가 그것인가 보다. 그만큼 예전에는 군인(고급 장교 이상)들의 관심사가 엉뚱한 데 가 있었다는 뜻이다. 국방은 개소리일 뿐이고 그저 패권에 미친 자들이 많았다. 또한 저게 현대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소린가? 마치 걸핏하면 무관이 반란을 일으키던 고대/중세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발상이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군 내부에는 실제로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았나 보다. 하긴, 두 번에 걸친 군사 쿠데타로 장기적인 군사독재가 이어졌던 나라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막에서는 사막에 어울리는 위장을 해야 하고, 정글에서는 또 거기에 걸맞은 위장이 필요하다. 도시에서는 시가지 경관에 조화가 되어야 한다.

다시 디자인 얘기!

처음에는 반군이 고유의 위장무늬가 없는 것으로 했었다. 그러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를 계속 만들어 나가면서 점점 짜임새가 생기자 반군도 체계적인 위장 패턴을 도입한 것으로 설정했다. 다만 정부군처럼 도시형 위장까지는 생각하지는 못한 까닭에 그저 얼룩덜룩한 모양으로 그린다고. 많은 차량을 디자인하면서 위장무늬를 ‘조화롭게’ 그리는 데 지치다 보니 나중에는 대충 선을 긋고 포토샵 기능을 이용해 일관된 특성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물결무늬 위장을 창조했다. 얼마나 신이 나던지 차량 하나에 다양한 색상, 다양한 형태를 조합시켜 보기도 했다.

생산을 꾸준히 하면서 틈틈이 위장 패턴을 연구했다. 특히 포토샵의 텍스처 기능에 주목했지만 아무래도 전투차량 위장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텍스처에 ‘흐리게’ 기능을 주고, ‘자동선택’ 도구로 빈 공간을 찍어 형태를 얻으면 다시 거기에 칠을 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발전해 나갔다. 2009년 가을에 있었던 많은 실험들은 하나하나 모아서 위장무늬 파일의 레이어 각각에 간직했다. 다음 그림은 그 레이어 패널을 보여 준다.


위장무늬 모음 레이어

아래 그림은 그 중 쓸 만한 것들을 보여 준다. '타일 변형 2'라고 되어 있는 무늬가 나중에 '블록카모'로 명명한 것이다. 물결무늬는 순수한 포토샵 기능은 아니고 일단 붓으로 무늬를 그린 뒤에 필터 기능으로 처리한 것이다. 시티카모는 소설 관련하여 처음 디자인한 것인데 작업 자체도 무척 까다롭지만 균형 있게 어우러지도록 그려야 하므로 더 어렵다. 결국 나중에는 모든 무늬를 포토샵 기능으로 설계하게 되었다.



이 많은 레이어들이 모두 결과물은 아니고 과정도 담겨 있다. 그 과정을 따로 글로 기록하기보다는 같은 파일에 레이어로 남겨 두는 게 찾기 쉽기 때문이다. 혹은 같은 무늬라도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새로운 형태가 되면 그런 것까지 간직해 두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마음에 드는 패턴을 얻고는 정부군의 새로운 도시형 위장으로 ‘선정’했다. 그 뒤로도 종종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하다가 마음에 드는 패턴을 또 발견했는데 정부군 무늬는 이미 선정한 까닭에 반군에게 넘겨(!)주었다. 드디어 반군도 ‘제대로 된’ 위장무늬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 또 새로운 일화가 생겨나는데 마치 실화처럼 역사성(!)을 띠고 있기까지 하다. 디자인을 하다가 일화가 생겨난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예로 앞의 ‘The Day of DEVA’ 차량의 위장색 변화가 그렇다. 그 그림을 보면 맨 마지막 것은 차체 윗부분의 장갑판 패턴이 다르다. 그 역시 다양한 시도를 하다가 나온 결과물인데, 거기서도 일화를 만들었다.

저 차량은 반군 지도자인 ‘코널’의 지휘 차량이다. 어느 날 정부군 병사의 대전차로켓에 피격되지만 다행히 큰 피해는 없다. 다만 이미 피격된 장갑판을 교체하기로 하는데, 때마침 새로 도입한 장갑이 있어 그것으로 바꾼 것이라는 줄거리다. 이후 또 다른 차량을 디자인했는데 꽤나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코널의 차량으로 하기로 했다. 그럼 먼저 만든 디자인은 버리나? 그게 아니다. 이 역시 전투가 점점 격해지면서 코널이 보다 나은 장갑차량으로 갈아탄 것으로 설정했다. (지크프리트 디자인 후기에 삽입된 ‘코널’이 그것이다.)

최근 방영된, 기억에 관한 KBS 다큐멘터리를 보니 미국의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뇌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부위와 미래를 상상하는 부위는 서로 같다. 여기서 미래는 과거와 별개가 아니라 과거에 의해 창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어느 분야에서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료를 분석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얘기다. 뇌 특정 부위의 기능이 겹친다는 것인데, 나처럼 직접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본 사람에게는 색다른 얘기도 아니다. 여기 올렸던 디자인 후기만 봐도 그렇다. 과거 시대의 이런저런 지식과 자료를 ‘즐겨’ 들여다보던 습관이 미래 창조와 직결되고 있다. 좀 다른 얘기이기는 하지만, 예전에 나는 가상 사회(독재국가)를 배경으로 한 단편 풍자소설에서 이런 말을 남긴 적 있다.


(머리말)

그 옛날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이 중원을 지배하였을 때, 몽골병사들은 중국의 논밭을 마구 황폐화시키고 초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말에게 먹일 풀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찌 보면 철없는 아이 같은 순진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끝말)

중국에서 있었던 몽골병사들과 같은 행위는 현대 세상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심지어 같은 문화권 내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단계 진보한 문화를 접할 때 그럴 수도 있고, 세대간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꺼리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이해 범위가 더 넓을 수 있는 것이다. 새 세대는 앞 세대의 모든 것을 보고자라지만,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의 문화가 낯설기만 하다.

그것은 현대와 조선시대 정도의 차이로 벌려놓으면 좀더 확연해진다. 역사학의 존재가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SF의 기능 중 하나는, 역사학과는 반대로, 미래의 정서를 미리 맛보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역사를 언급하면서 그에 대응하는 미래적 개념, 즉 SF의 기능에 대해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내 나름대로 SF의 존재 의의, 기능, 그 가치를 처음 분류한 것은 1990년대 상반기의 일이었다. 당시 모형동호회에서 몇 년 만에 모처럼 회보를 만든다며 내게는 SF의 세계에 대한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해서 글을 쓰면서 처음 생각했던 일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소설 <쥐라기공원>의 대성공에 힘입어) SF가 처음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 외국의 유명 작품이나 국내 창작물의 출간 붐이 일고 있었다. SF에 대한 이론이라면 한국에도 나보다 잘 아는 이들이 많았지만 실제 창작도 해 보고 무지한 이들 때문에 수모도 당하며 그 변천을 유심히 지켜본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내가 몇 가지로 분류한 SF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래 예측.

이는 SF라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평론가라는 이들이 획일적으로 내놓던 말이다. 90년대 이전에는 성인용 완역판도 거의 없었고, 주로 아동 대상의 전집 형식으로 출간되었는데 책머리에는 늘 유명한 아동 문학가들의 추천사가 들어 있었다.

“21세기에는 차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잠수함을 타고 바다 속을 여행하며, 누구나 우주를 여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게 SF의 존재 가치인가?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낙후되었던 한국에서 이런 책을 읽으며 자란 어린이들이 과학 분야에 뛰어들어 과학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동기 부여이지, 미래 예측과는 별개의 얘기다.

이런 획일적인 SF 추천사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것이 SF의 모든 가치는 아니다.

여러 해 전 어느 날 당시 대학생이었던 친척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21세기가 되면 세상이 확 달라질 줄 알았는데 별로 변한 것도 없더라고요. 그림을 보면 21세기에는 건물도 아주 다르게 생겼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크학학!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나 보다. 나도 SF에 대한 흥미를 공유하는 주변인들과 종종 그런 얘기를 하고는 했다. 수십 년 사이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변화는 보이지 않는, 혹은 작은 것에서 온다. 근년부터 나는 지인들에게 이런 말을 종종 한다.

“알고 보면 우리는 이미 SF의 세상에 살고 있다. 누구나 거리를 걸으며 통화를 하고, 인터넷으로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정보든 접할 수 있다. 휴대폰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온라인 공간에 올린다. 불과 20년 전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미래예측 학자들이나 SF 작가 대다수가 놓친 것도 바로 이 부분이라고 한다. 해저 여행, 우주여행, 로봇, 레이저 무기 등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루면서도 개인 컴퓨터 보급과 정보통신의 발달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나는 이런 말을 종종 한다.

“기술의 발달 때문에 신개념의 제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상상이 먼저이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기술이 발달한다.”

우주여행이나 로봇, 광선 무기 등은 기술적인 기반이 전혀 없던 시대였음에도 그저 동경 때문에 생겨난 개념이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누가 로봇에 그 미세한 반도체가 사용될 것이라고 예견했겠는가. 그저 인간을 닮은 인공의 존재를 상상했을 뿐. 그래서 오래 전에 쓰인 SF를 보면 로봇이 파괴되었을 때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굴러 나온다. 로봇을 전자공학이 아닌 기계 분야의 연장선에서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로봇의 두뇌에도 반도체 칩이 아니라 주판(아날로그 계산기)이 들어 있었던 셈이다.

로봇 공학 3원칙을 제창한 세계 최고의 SF 작가이자 수학, 역사 분야의 저술가였던 아이작 아시모프도 컴퓨터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의 풍자 단편을 보면 세상이 크게 발전하고 인류가 우주로 뻗어나가면서 컴퓨터도 점점 커진다. 최초의 컴퓨터는 버스 크기였는데 반도체가 아닌 진공관을 메모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시모프는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컴퓨터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것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또한 전산망 개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중앙의 컴퓨터 하나로 모든 것을 관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 기술문명 비판과 성찰.

유명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의 1920년대 영화 <모던 타임스>를 보면 ‘기계의 일부가 되어 움직이는 인간’이 나온다. 컨베이어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간(노동자)이 노예처럼 되어 버린 세상을 풍자한 것이다. 세밀한 분업화로 인해 생산라인 근무자는 다른 기술은 없고 그저 똑같은 작업만 하루에도 수천 번씩 반복한다. 반복 업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그저 그 단순한 기능 하나만 수행한다는 점을 비꼰 듯하다. 실제로 주인공은 그 작업 동작이 몸에 배어 어디 가나 그런 행동을 한다. 그가 하는 일은 오직 렌치로 볼트를 죄는 것인데, 길을 가다가 여자 외투의 가슴에 달린 단추 두 개를 보고는 역시 렌치로 조이다가 된통 당한다.

20세기 들어 기술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그에 대한 성찰, 나아가 비판을 다루는 SF도 많아졌다. 불과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인들은 SF를 천시했다는 말을 전에 한 바 있다. 그런데 SF 장르이면서도 필독서 아닌 필관화(필히 보아야 할 영화. 크학학!)가 몇몇 있었는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11: 우주 오디세이>(1968년)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6년)가 그것이다. 전자가 우주여행을 가장 사실적으로 다룬 작품이라면 후자는 새로운 형태의 로봇 캐릭터를 창조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 영화들을 꼭 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런 사실과는 관계없이 영화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지만 SF 관계자, 마니아에게는 그 과학적, SF적 관점이 더 중요하다.

독일 영화인 <메트로폴리스>는 인간이 노예처럼 일하는 전체주의 성격을 띤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어둡고 음산한데 연출 분위기는 대규모 오페라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근대철학의 종주국인 독일은 SF, 공포, 심리 등 다양한 영화 장르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문화를 통제하고 인종 탄압을 하자 많은 예술인들이 미국으로 달아났고 이후 할리우드에서 장르 영화들이 크게 발달했다. 다만 이미 오락성을 중시하는 상업영화들이 기틀을 다진 미국 영화계에서는 작품성을 인정받을 만한 영화가 나오지는 못했다. 주로 흥미 위주였기 때문이다.

그 중 <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하는 로봇 마리아는 비록 금속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지만 여성의 외형적 특성을 그대로 살린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또한 단순히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한 여인의 분신, 인격체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인간을 닮은 로봇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다 아는 조지 루커스의 ‘미국의 신화’ <스타워즈> 시리즈 6부작에는 내내 등장하는 인간형(휴머노이드) 로봇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C-3PO이다. 이 ‘시 스리피오’는 로봇 마리아에 대한 헌사(오마주)라고 한다.

한국의 아동용 SF 추천사에서 문학가들이 “희망에 찬 21세기”를 부르짖던 시기에 클로버문고라는 곳에서 단편집 한 권이 나온다. 그런데 거기 수록된 작품들은 희망이 아니라 암울한 미래를 보여 준다. 꼭 미래가 아닐지라도 미지의 존재와 조우하여 절망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나는 이 책이야말로 한국 SF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뜬구름처럼 미래를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도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삽화들로 볼 때 일본에서 출간된 단편집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일본은 이미 SF 장르가 꽤 성숙한 나라여서 한국과는 관점과 해석이 크게 달랐다.)

나는 뭐든 긍정적으로 보고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장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고와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준비 자세는 별개의 것이다. 비유를 들어 보자. 늑대 한 무리가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데, “저 계곡 너머에는 사슴이 널렸다”며 무조건 계곡을 건너라고 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사고인가? 사슴이 널린 땅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여정, 거기에 도사린 위험도 알아두어야 하고, 늘 주의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희망에만 젖어 막무가내로 치닫다가 괜스레 전멸을 한다면 차라리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 못하니까. 그러기에 늘 부정적 측면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그 단편집이 내게는 또 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타워즈>의 파급효과로 온통 신나는 우주액션 영화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1980년대 상반기, 거기에 제동을 건 영화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터미네이터>이다. 인간이 만든 기계(컴퓨터)가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말살하려 든다는 것이 큰 줄거리다. 그 저예산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또 유사품들이 잔뜩 생겨났다. 신나는 우주탐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인간의 창조물인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려 드는 암울한 미래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셋째, 문명 성찰, 사회 풍자 기능.

가상 사회를 배경으로 한 몇몇 영화 및 단편 SF들을 접하며 주목한 점이다. 이 또한 SF의 하위 장르이지만 그리 흔치는 않은 편이다. 대중적인 인기도 낮고 특히 한국에서는 거의 먹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고 자정을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분야이다. 아니? 별로 인기도 없고 그리 기억에도 남지 않는 그런 장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나는 그 기능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전에는 이솝 우화 같은 우화가 자성과 계몽에 큰 구실을 했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인 지금은 SF가 그 역할을 넘겨받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체계적인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대중의 지식수준, 의식수준이 높아진 뒤로는 우화는 아무래도 어린이용이 될 수밖에 없다. 유아기부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이미 먼 옛날의 성인들보다 아는 게 많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몸을 담고 사는 세상도 크게 바뀌어서 온통 시멘트와 기계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끝없이 변화한다. 마을 단위의 삶은 이미 오래 전에 저 뒤로 사라지고 도시, 국가, 나아가 국제적으로 교류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걸맞은 성격을 가진 작품이 우화를 대신해야 하는데 가상 사회를 배경으로 한 풍자물이 딱 적격이다.

가상 사회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라 어떤 환경, 어떤 체제 하에서든 적응한다. 그렇기에 그 사회의 틀에 갇혀 객관적 시각을 잃게 된다. 가상 사회에서 일어나는 상식 밖의 일들은 우리가 사는 사회 자체를 돌아보게 한다.”

이렇게 내 나름대로 SF의 기능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쯤, 하나의 목적성에 편집증을 가지고 미쳐 버린 독재자가 지배하는 국가를 다룬 풍자소설을 쓰면서 거기에 머리말과 끝말을 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또 다른 기능을 발견했다. 이미 저 앞에서 인용하기도 했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잘못을 통해 현재를 돌이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도 같다. 일기는 한 개인에게 있어 역사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는 미래에 대비할 필요도 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그 변화에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SF를 통해 미래 세상을 미리 맛본 이들은 그러한 변화가 닥쳤을 때 훨씬 쉽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든 게임이든 SF를 흔히 접하며 살아가는 요즘의 젊은 세대는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한다 해도 새로운 기술적, 사회적 환경이 닥쳤을 때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것이다. SF라는 것을 전혀 접하지 못한 이가 있다면 그 변화라는 것이 크나큰 충격이 될 수도 있다.

엉뚱하게도(?) SF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얘기로 한참 동안 샛길로 갔다. 과거를 연구하며 얻은 것, 또한 그렇게 발달한 뇌가 미래 설계에도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디자인 후기에서 종종 여담으로 들어갔던 과거 시대의 전투차량에 대한 내 향수가 미래적인 차량 디자인으로 직결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변화를 알기 때문에 창조도 가능한 것이다.

다음은 그 가상사회 풍자소설 시리즈에 속하는 또 다른 작품에 삽입한 글이다.

(머리말)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표트르 대제가 건축한 페테르부르크의 궁성이나 중국의 진시황이 세운 만리장성은 수많은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로 탄생하였다. 지금은 그것들이 세계적인 명물로 탈바꿈하여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조상들이 흘린 피가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끝말)

때로는 고달픈 현재가 풍요로운 미래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과 시간은 매 순간 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먼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무조건 희생시킬 수는 없다.


내가 이러한 주제에 처음 주목한 것은 과거에 계몽사가 발간하던 당시의 <월간과학 뉴튼> 때문이었다. 그 월간지에는 ‘지오그래픽’이라는 시리즈가 있었는데 한번은 페테르부르크의 궁성을 다루었다. 유럽의 변방이며 문화적/기술적으로도 가장 낙후되었던 러시아에서 그 궁성을 건설하는 것은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후손들은 그 덕을 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후일 뉴스에서 북한의 피라미드형 호텔을 보고는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은 말 그대로 ‘고난의 행진’을 하고 있지만 후손들은 또 그 덕을 보겠구나. 저것도 관광자원이 될 게 아닌가. 이데올로기 관련해서는 앞뒤 못 가리고 무조건 욱하는 단순한 이들은 무조건 비난만 한다. 그러나 비난을 한다고 바뀌는 것도 아닌데 어쩔 것인가. 뇌의 CT 사진을 보면, 정치에 신경을 쓸 때는 다른 모든 부위가 정지되고 그저 특정 부위만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즉 사고력이 지극히 단순해지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 지지 혹은 반발 정도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까지 들어가면 더욱 심해진다. 지크프리트 후기에서 강조했던, 유대인과 슬라브족의 씨를 말리려 했던 히틀러나, ‘출신성분’을 따져 수많은 인민을 학살했던 스탈린, 마오쩌둥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북한 놈들은 모두 야만적인 짐승이니 싹 없애 버려야 한다고 가르쳤던 대한민국도 다를 게 없다.

박정희 지지자들은 그가 쿠데타를 일으켰건 장기 독재를 했건 국민을 압제했건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점만을 강조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페테르부르크 궁성이나 만리장성도 마찬가지다. 특히 만리장성 건축에는 엄청난 희생자가 따랐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며 홍보거리가 되었다. 그러기에 북한의 피라미드 호텔도 훗날 같은 구실을 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어쨌든 오늘의 고난, 현재의 국민이 희생한 대신 후손들이 덕을 본다는 것은 대를 위해서는(?) 나름 바람직한 것도 같지만 그것은 국민 개개인의 인격은 무시한 발상이다. 솔직히 나 역시 그랬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세뇌되어 자랐으니까.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런 문제를 깨달았기에 그 단편의 끝말에 머리말에 대한 반전을 넣은 것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대를 이어 생각해 봐도 그렇다. 대에 걸쳐 계속 희생하고, 후손은 덕을 본다? 그게 과연 행복한 국가, 행복한 체제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것은 끝없는 고난과 희생의 되풀이일 뿐이다.

정부군과 반군의 위장무늬 체계를 놓고 ‘역사성’이라는 말을 하다가 옆길로 샜다. 이 작품은 서울에서 내전이 벌어진다는 것이 골자인데, 정부군은 차량의 위장색을 미군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시티카모에서 이른바 ‘마블카모’로 바꾸었다. 반군은 ‘물결무늬 위장’을 쓰다가 ‘블록카모’라는 또 다른 위장을 도입한다. 이것은 사실 작가 자신의 흥미 또는 보다 나은 위장 패턴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일종의 ‘변천사’가 되면서 그 이유를 끼워 넣고 일화도 만들어 낸다. 그 자체로 역사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블록카모를 만드는 작업 과정을 보자.


1번. 작업 창에 ‘페인트통’으로 색을 채우고 [필터>텍스처>타일]에서 적당히 수치를 조절해 타일들이 얼마쯤 어긋난 듯한 모양을 만든다.

2번. ‘자동선택’ 도구로 빈 부분을 클릭해 새 레이어에 색을 채운 뒤 [필터>흐리게>가우시안]에서 수치를 1로 해서 번지게 만든다. 이 작업을 한 번 더 반복한다. (빈 부분 자동선택 → 새 레이어 → 페인트통 → 가우시안 수치 1)

3번. 다시 자동선택 도구로 빈 부분 클릭 → 새 레이어 → 페인트통 → ‘더 흐리게’. 3번이 그렇게 해서 얻은 블록카모이다.

4번. 이것은 플러스알파다. 2번 과정에서 가우시안 값을 더 크게 주거나, 그 과정을 몇 번 더 하다 보면 결국 결과물에서는 연결된 무늬 중 가는 부분이 끊어지면서 또 다른 위장 패턴으로 바뀐다.

이것은 3번에서 가우시안 1.3을 주고 자동선택 과정을 거친 것인데, 1.5 정도만 주어도 보다 많은 부분의 연결이 끊겨 온통 작은 파편들로 바뀐다.


흐리게 하는 기능에서 꼭 저런 수치를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가 원하는 모양, 원하는 굵기에 따라 다른 값을 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적정 형태는 저것(3번)이었다. 너무 선이 굵거나 가늘면 지나치게 튀거나 혹은 반대로 위장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위장무늬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무늬의 형태와 크기의 다양성이다. 너무 일정하면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 이미 위장으로서의 가치를 잃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지구 생태계, 인간 사회뿐 아니라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에서도 강조하는 부분이다. 전파를 통해 지적인 외계 생명체를 찾거나 혹은 반대로 우리의 뜻을 전달할 때 일정한 패턴이라는 것을 중시한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직선적인 도로나 시가지의 일률적인 형태에서 지적인 생명체(지구인)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고 한다.

자연에서는 일정한 형태의 연속성이라는 것을 찾기 힘들다. 그러기에 풍화로 인해 갈라진 바위가 어쩌다 직선과 연속성을 띠면 고대 문명의 흔적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바다 속의 바위들이 그럴 경우 역시 수몰된 문명을 찾았다고 흥분한다.

자연계에서 획일적, 연속적 형태를 찾기 힘든 이유는 물론 엔트로피 현상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질서의 붕괴인데 그것은 확률론에 의거한 것이다. 사람이 바둑돌의 검은색과 흰색을 번갈아 펼쳐 놓을 수는 있지만, 그냥 쏟아 부었을 때에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흰색끼리, 검은색끼리만 배열되지도 않는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률적으로 볼 때 너무 낮아서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예로 두 가지 색의 공이 든 슬롯머신에서 열 개를 뽑는다고 하자. 첫 번째 공이 흰색일 확률은 1/2이다. 두 번째 공까지 흰색일 확률은 1/4이다. 그 이유는 모든 가능성, 즉 경우의 수를 나열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첫 번째 공 - 백 백 흑 흑

두 번째 공 - 백 흑 흑 백

즉 4개의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에 두 공이 모두 흴 가능성은 1/4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열 개가 모두 흰색으로 뽑힐 가능성은 1/1024, 즉 2의 10승 분의 1이다. 그 수가 20개이면 백만 분의 1, 100개이면 10의 30승 분의 1의 확률이 된다.

이러한 확률의 법칙 때문에 자연계에서는 천편일률적인 형태가 나타나기 어렵다. (혼돈이론 등도 있지만 가장 기초적인 과학 이론에 비추어 본 것이다.) 열역학도 여기에 기초하는데, 그러기에 열(熱, 에너지)이 흩어지기는 해도 스스로 한 곳에 뭉치지는 않는 것이다. 즉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것이다. 만약 에너지가 스스로 뭉치는 일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무한정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다.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외적인 힘 역시 에너지이고,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에는 더욱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러한 현상을 역행하여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가상의 존재를 상상하게 되는데 이것이 ‘맥스웰의 도깨비’이다. 어떤 학자는 인간들이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니 인간이야말로 맥스웰의 도깨비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철이나 금 성분이 든 암석을 녹여 거기서 쇳덩이와 금덩이를 얻고, 마구 흐트러진 돌을 모아 탑을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므로 결코 인간이 맥스웰의 도깨비는 아니지만, 에너지가 아닌 물질의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인간은 적어도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조하려는 ‘의도’에 있어서만은 맥스웰의 도깨비인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위장무늬는 일정한 패턴을 가지면 안 된다. 물론 자동으로 디자인할 경우 미술에서 말하는 사방연속무늬 개념처럼 여러 개의 무늬를 건너뛰어 같은 무늬가 반복될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이미 그 사이에 깔린 많은 무늬가 눈을 혼란시키기 때문에 쉽게 반복성, 연속성을 찾지는 못한다. (예전의 자잘한 예비군복 무늬나 교련복 무늬도 그렇다.) 또한 차체는 건물 벽면처럼 단순한 사각형이 아니고 복잡한 형태를 띤 까닭에 또 다른 변화를 갖게 된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시험 삼아 새로 디자인한 트래클 카론에 몇 가지 무늬를 입혀 보았다. 그러자 더욱 멋있어졌다. 아무래도 SF 분위기의 트래클에는 위장무늬를 넣지 않겠다는 생각을 버려야겠다. 멋있으면 넣는 거다! (‘위장에 효과적이면’이 아니다. 크학학!) 이렇게 하자 그 넓적한 스커트 때문에 애먹었던 카론이 한결 멋있어지고 변화가 생겼다.

결국 ‘대표’로 내밀 그림도 마블카모가 들어간 것으로 바꿨다. 카론 후기에서 언급했던, 정면도가 허전해 보여 ‘MV Sport’라는 업체 로고를 넣었다가 없앤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 가지 위장무늬를 넣어 본 트래클 카론


맨 위의 것은 마블카모를 입힌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마블카모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 패턴인데 포토샵 필터의 ‘점각’이란 기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은 ‘과정에서’ 생겨났다기보다는 그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다소 자연의 패턴을 닮은 까닭에 도시의 폐허에 어울리도록 계속 작업하다 보니 마블카모에 이른 것이다. 세 번째 것은 반군의 블록카모 위장이다.

마지막의 것은 즉흥적으로 생각나서 무늬 종류나 크기, 혹은 색상을 달리해 조합해 본 것이다. 앞의 차량들은 기존의 바탕색에 각각의 검은색 위장무늬를 입힌 뒤 불투명도를 20 정도로 낮추었던 것이고, 마지막 것은 바탕색까지 모두 따로 만들어 덧씌운 것이다.


군에서 휴가 나온 청년 때문에 새로운 한국군 전투복의 디지카모를 잠시 살펴보다가 큰 덩어리와 작은 조각들의 조화에 주목했다. 무늬가 큼직하면 멀리서 보았을 때 위장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효과가 떨어지는데 기존의 얼룩무늬가 그럴 것이다. 반대로 자잘한 무늬는 가까이서는 효과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단색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예로 흰색과 검은색이 조합된 무늬라면 회색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기에 큰 덩어리와 자잘한 조각이 조화된 패턴이 가장 나을 것이다. 2차 대전 독일군 친위대 전차의 매복위장, 친위대 병사들의 위장복도 그러한 이점을 선구적으로 고려했던 셈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한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마블카모와 그 마블카모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 ‘점각’ 패턴을 겹치게 한다. 그런 식으로 레이어가 세 개쯤 겹치게 하고, 맨 아래 레이어에는 보다 밝은 바탕색을 깐다. 이렇게 하자 매우 복잡한 무늬가 나타났는데 네 번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바로 한국군의 신형 전투복 위장무늬를 연상케 한다. 만약 어느 한 가지 무늬의 규격을 좀 더 크게 했다면 보다 비슷해졌을 것이다.

사실 처음 이 마블카모를 디자인하던 당시에 이러한 조합을 시도해 보았다면 그때 이미 탄생했을 것이다. 만약 한국군 신형 전투복 개발 팀이 이 그림을 보았다면 뜨끔했을 것이다. ‘어디서 정보가 샜지?’ (크학학!)

실제로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이런저런 무늬를 만들 때마다 한 가지 무늬를 다양한 크기와 색상으로 조합시켜 본다. 대표적인 것이 물결무늬 위장이다. 다만 마블카모를 만든 2009년 늦가을 당시에는 보다 다양한 차량 디자인에 매진하느라 위장무늬 조합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복잡한 위장무늬 시험 결과로 정작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니라 그 효율성에 대한 것이다. 이 매우 복잡한 무늬는 가까이서 보면 정말 눈을 혼란시킬 것이다. 어느 정도 큼직한 덩어리도 있어 웬만한 거리에서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단, 저 색상이나 복잡성은 도시보다는 야지에 어울린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상 멀어지면 무늬들이 흐려져 거의 단색으로 보일 것이고, 따라서 차량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다만 그 크기를 확대한다면 괜찮을 것이다. 차량의 크기에 따라 무늬 크기도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저 복잡한 무늬를 누가 그릴 것인가. 공장 또는 병기창의 도색공들은 뼈가 빠질 듯하다. 생산성도 떨어진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없다. 나는 차량의 위장무늬를 기계가 자동으로 그리는 것으로 설정했다. 자동 세차 기계 비슷한 설비에 차량이 들어가면, 일일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틀에서 세차게 도료를 분사하여 한꺼번에 그리는 것이다.

이런 발상 역시 자동화라는 기술적 관점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디자인을 하다 보니 거기에 맞추어 방법론을 찾아낸 것이다. 처음 차량들을 디자인할 때에는 서로 다른 층에는 무늬가 이어지게 그리지 않았다. 그건 비현실적이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작업하려면 도색공이 무척이나 애를 먹게 된다.

그런데 컴퓨터 작업에서는 그 반대다. 한꺼번에 무늬를 그리고 ‘선택’ 작업을 한 뒤 필요 없는 부분은 제거하는 게 가장 간단하다. 오히려 층이 진 부분에 각각 따로 작업하는 게 더 까다롭다. 그래도 처음에는 ‘사실적으로’ 그렇게 작업했다.

그런데 대량생산(디자인 작업) 체제에 들어가다 보니 그것도 귀찮아졌다. 그즈음 마블카모를 개발했는데 무늬를 기계가 한꺼번에 그리는 쪽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어쨌든 디자인 작업 단순화를 위해 포토샵의 기능을 이용해 만든 마블카모는 말 그대로 ‘디지털 형태의 무늬’인 한국군의 ‘디지털 위장무늬’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물론 현실의 개발 팀에서는 위장 자체에 목적성을 두고 개발한 것이지만.


이어서 위장색이 아닌, 정반대로 돋보이는 무늬 얘기를 해야 하는데 또 여기서 끊고 다음으로 넘겨야겠다. 워낙 잡스러운(크학학!) 얘기들이 많이 뒤섞여 있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다. 그 많은 내용을 카론 후기에 넣으려고 했다가 무늬 이야기는 별도로 다루기로 했는데 이 또한 너무 길다. 그래서 위장과는 정반대로 눈길을 끄는 곡예비행단 얘기는 다음으로 넘긴다.


이건 뭐, 위장무늬 얘기를 하다가 이리저리 새서 엉뚱한 잡담이 더 많았다. 양자(量子)도 아닌데 이리저리 제멋대로 튀는 뇌라서 어쩔 수 없다. 일일이 자료를 찾아 확인을 한 것도 아니니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오류가 보이면 즉시 지적해 주시고, 수많은 뇌주름으로 너그럽게 오해(!)해 주시라. (크학학!)

by 뇌의가호 | 2013/02/04 17:11 | 메카뇌즘 Mechanoes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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